2024년 8월 6일 하.복.주.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
송영종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
마태복음 12장 9~21절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바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손이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시는 이적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때 마침 그 회당에 손이 마른 사람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쳐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환우들을 고쳐 주시는 사건은 이전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에게 더 이상 특별한 일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럼 오늘 이 사건도 그렇게 보면, 특별한 일이 아닌, 또 한 사람의 병자를 고쳐 주신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건 역시, 단순히 예수님께서 또 병자를 고쳐 주셨음을 전해주기 위해 저자인 마태가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이 사건에서도 예수님께서 알려주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기록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해야 합니다.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일반적으로 병든 자는 회당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유대 사회에서 병자는 반드시 제사장에게 고침 받았다는 확인을 받고 증서가 있어야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사람들과 다시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유대 사회에서 지금 회당에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원래 그 사람이 회당에 있던 사람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일부러 거기에 손이 마른 사람을 데리고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그들이 왜 예수님에게 손이 마른 병자를 데리고 왔을까요? 오늘 본문 10절에 정확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유대인들, 특별히 유대 지도자들은 지금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불치병에 걸린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일종의 함정을 판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에게 병자를 고친 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불치병에 걸려 평생 손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다면 아무리 유대인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좋은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병자를 고쳐 주시는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할까요? 문제는 병자를 고치는 것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관심은 병자를 고치는 것보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율법에 관심이 더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모세 오경의 십계명 중 4계명에 의하면,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히 지키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안식일에 일하는 것은 곧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유대인들의 고발의 핵심은 병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병자를 고치려고 해도 안식일은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율법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손이 마른 사람을 고치시며, 전해준 말씀은 전해 다른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병자를 고치는 것을 율법이 아닌 선의 개념으로 설명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무슨 말입니까?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을 율법의 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선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위선적인 행위를 지적하셨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은 못하게 하면서, 그들이 키우는 양이나 소나 염소가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은 즉시 건져 올려도, 전혀 죄가 되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양은 건져 올리는 행위는 죄가 되지 않지만, 병자를 고치는 것은 죄로 규정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규정 혹은 율법 속에 숨어 있는 그들의 이중성과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 그 율법의 해석이 전혀 다르게 이해되고 있다는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첫번째로 이 율법은 하나님의 계명 속에 포함되지 않는 유대인 자신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언급하신 것이고, 둘째로 십계명의 4계명의 뜻이 하나님께서 처음 모세를 통해 주실 때의 그 뜻과 다르게 해석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의 근본 기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십계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들이 그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과 계명의 뜻을 제멋대로 이해하고 해석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사람의 법으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선민이지만, 결코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고, 그 잘못된 법을 가지고 제멋대로 적용하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라고 다른 사람을 소외시키고, 고립시키며, 마음대로 남용하여 아무런 유익을 주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섭고, 무거운 족쇄가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법, 그 율법의 참 뜻을 가르쳐 주시려 하십니다. 그들의 잘못을 알고 있고, 지금까지 잘못 사용하고 있었던 그 법을, 예수님께서는 선의 개념으로 이해하여 접근하고 적용하라고 알려주십니다. 왜냐면 그것이 세상 법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십계명 중 4계명을 주실 때 하신 말씀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하셨는데, 여기서 유대인들은 어디에다 방점을 두었습니까? “지키라”에 강조점을 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문자적으로 지키려고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방점을 어디에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거룩히” 방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말은 알다시피 구별됨 이란 뜻입니다. 그 말은 세상과 구별됨을 말씀하고, 죄와 다른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양도 구덩이에서 건져 올리는데, 양보다 귀한 사람을 건져 올리지 못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모순인 것처럼, 병자를 고치는 일은 너무나 거룩한 일을 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안식일에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과 말씀은 하나님 백성의 유익과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사용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말씀을 실천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