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0일 하.복.주.새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시는 목자
송영종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시는 목자
스가랴 11장 4~14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는 잡힐 양떼를 먹이라
산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거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붙이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찌라도 내가 그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하시기로
내가 이 잡힐 양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떼를 먹일쌔
한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내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대로, 망할 자는 망할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대로 두리라 하고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당일에 곧 폐하매 내게 청종하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줄 안지라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스가랴서는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 사람들에게 주시는 예언의 말씀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일종에 유대인 해방의 날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숫자는 불과 5만명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그들이 돌아오자 마자 제일 처음 한 일이 파괴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새 성전을 건축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지켜 주시고, 복을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유대인들은 그 일을 제일 먼저 한 것입니다. 하지만, 70년 노예 생활에서 돌아왔지만, 그 기쁨도 잠시, 그들에게는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은 나라가 없는 민족이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전을 짓고, 자신들끼리 이제 잘 해보려고 노력하겠지만, 여전히 예루살렘은 바사왕국의 식민지였고, 또 언제 다른 나라가 쳐들어와서, 그나마 살아 돌아온 5만명의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에게는 군사도 없었으니, 그들의 삶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불안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의 처지가 현대를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사탄은 늘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다니고 있고, 그런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불안해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교회 안에 있지만, 사탄과의 영적 전쟁은 결코 멈추지 않고 계속 지속되어 갑니다. 열강들의 무서운 전쟁 한 가운데 예루살렘 성이라는 곳에 머물고 있는 유대인들과 세상 속에 머물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똑같은 처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유대인의 모습이 현재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민족과 백성을 과연 누가 지켜 주고 구원해 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지금 이대로 살아간다면, 아마도 그들은 세상에서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백성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자신들을 이 위기와 위험에서 구원해 줄 현실적 메시야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고, 또한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을 지켜주고, 다시는 다른 나라의 종과 노예가 되지 않도록, 보호해 줄 수 있는 메시야를 그들은 누구보다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이것은 당연한 인간적 본능일 것입니다. 자신이 죽게 되었을 때, 누군가 자기를 살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그 메시야가 유대인 전부를 위한 메시야가 아니라,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는” 메시야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바라고 기다리던 메시야는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가 아니라, 세상에 잡혀 먹힐 위험에 처한 자신의 양떼를 구하기 위해 오는 메시야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5절 말씀을 보면, 양떼를 기르는 목자가 있는가 하면, 세상에는 양떼를 파는 자들이 있고, 그리고 그 양떼를 사는 자들이 있다고 언급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양떼를 잘 먹이고 키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양 떼를 이용해서 자신의 이득이나 이익을 보기 위해 양을 기르는 목자와 그 양을 팔아 넘겨 부유해지는 자가 있어서, 그 양을 산 자는 양을 잡아 죽여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이런 일들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라는 것입니까? 바로 유대인 자신들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을 그토록 바라며, 다른 나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 줄 것을 소망한다고 하면서, 지금 하는 짓이 무엇입니까? 서로 지켜주어야 함에도, 그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팔아먹고, 이용하며, 집단적으로 한 사람을 왕따 시켜, 자신들이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는 예루살렘 성 밖의 사람들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과 똑같은 짓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유대인들이나 성전 밖에 그들을 위협하고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거룩한 척하는 자들과 교회 밖에서 천박하게 죄를 짓는 자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지금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예언하시기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런 짓을 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이고, 건져 주지 않을 것이며, 망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예루살렘 성과 성전에서, 아무리 위험에 노출되었다 하더라도, 이방인들처럼 살지 아니하고, 구원하기 위해 오실 그 메시야를 기다리며, “잡혀 죽을 그 가련한 양떼들”은 먹이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장차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키 위해 다시 오실 메시야는 성전 안에서 자기만 생각하는 그런 이기적이고, 위선적이며, 잘 나가는 양을 위하여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지 않는 것 때문에, 잡혀 죽을 위기에 놓인 양 떼를 위해 오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거룩한 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자기 중심대로, 자기 고집대로, 자기 좋은 대로 살기 위해 다른 양을 잡아먹는 살찐 양떼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 하다가, 오히려 잡혀 죽을 위기에 놓인 양 떼입니까? 본문 9절 말씀에는 살찐 양떼는 메시야가 먹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고,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의 메시야는 그런 양떼를 위하여 오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죽임당하신 어린 양,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잡혀 죽임을 당하는 양 떼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