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3일 하.복.주.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송영종

사랑의 손길
사랑의 손길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서 4장 1~11절

요나서 4장은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나가 하나님에게 화를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요나는 독특한 선지가가 맞는 것 같습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거부하고, 저항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을 가다가, 겨우 회개함으로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나고, 거기다가 실패한 요나를 다시 사명자로 삼으시고, 그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다 체험하고, 경험한 사람이 바로 요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난 요나가 지금 하나님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요나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아무튼, 왜 이렇게 요나가 못마땅하고 화가 나 있을까요? 그 이유는 니느웨 성이 심판 받아 멸망하지 않고, 모든 백성이 회개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 뜻을 돌이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니느웨에 재앙도 심판도 임하지 않는 것을 보고,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가서 심판을 외쳐라 하신 하나님이 지금 못마땅하고, 자기가 한 일이 헛수고가 되어 버림에 대하여 화가 났던 것입니다.

그럴 것 같으면 아예 처음부터 자신을 보내지 말든지, 보내셨으면 말씀대로 하시든지 해야 한다는 것이 요나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말합니다. 요나는 지극히 자기의 입장과 자기 사고로 하나님의 일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런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묻고 계십니다, 4절 말씀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잘못을 뉘우친 자를 용서해 주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고, 그 뜻을 돌이키는 하나님에 대해, 요나가 화를 내는 것이 옳은지 하나님께서 묻고 계시는 것이죠. 그러자 참 재미난 장면이 바로 그 다음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다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것입니다. 요나는 도저히 하나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화를 내고 투덜거리며, 니느웨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고, 그늘에 앉아, 그 성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궁금해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해 박넝쿨을 만들어 주셔서, 요나는 너무 시원하게 니느웨 성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요나는 그렇게 행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역시 우리 하나님! 박넝쿨까지 준비해서 나를 도와주시는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에 하나님께서는 그 박넝쿨을 벌레가 갉아먹게 하셨고, 요나를 기쁘게 해 주었던 박넝쿨의 잎사귀가 다 없어져서, 뜨거운 햇빛에 쪼여 혼미하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요나가 다시 하나님에게 화를 냅니다, 8절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똑같은, 계속 반복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9절,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옳으냐.” 이 상황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화를 내는 요나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뜻과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10-11절에 그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요나가 자기가 수고하여 만들지 않은 박넝쿨이 없음에도 이렇게 슬퍼하고 “그 박넝쿨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창조하시고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신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설령 그들이 잘못을 하여 벌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회개하면 그 뜻을 돌이키고, 그들을 아끼고, 다시 사랑해 주는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느냐 하는 것을 말씀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도 사람들은 너무 아쉬워하는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시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자들을 사랑하셔서 그 심판의 뜻을 돌이키는 것이 잘못된 것인지를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과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결국 화를 내고 있는 요나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용서받고 이렇게 활동할 수 있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이 없었다면, 요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나 말대로라면, 요나가 회개할 때, 하나님은 처음 품었던 마음 그대로, 절대 용서해 주면, 안되는 거죠. 지금 니느웨가 심판을 받을 것인데 회개함으로 하나님께서 그 뜻을 돌이킨 것이, 하나님께서 요나의 회개 기도를 들으시고, 그 심판의 뜻을 돌이켜 물고기 뱃속에서 나오게 하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요나가 지금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하심에 화를 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하심으로 심판에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없었다면, 요나도 없고 지금 니느웨도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보여주려 하십니다.

사랑하는 거룩한 장로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또는 하나님의 백성,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성령을 소유한 성령의 사람으로, 이런 부분을 참으로 조심하고, 우리의 이중적 잣대와 자기 모순 같은 신앙과 믿음을 늘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용서받은 그대로, 자신도 다른 이들을 용서해야 함에도, 마치 다른 사람의 잘못은 용서받아서 안되는 것이고, 자신도 용서할 생각이 없는 그런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을 가졌다면, 하나님께서 묻는 말씀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이 옳으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나서의 이야기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들어갔다, 살아서 나왔다는 영화 같은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왜 죄인을 사랑하시고, 그렇게까지 용서하시며,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지를, 요나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우리 이제, 하나님께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고, 사랑받았으니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의 의도와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