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9일 하.복.주.새
고통 너머에 있는 믿음과 은혜
송영종


고통 너머에 있는 믿음과 은혜
요한복음 11장 39~44절
예수께서 “돌을 옮겨 놓아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다가 말하였다.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사람들이 그 돌을 옮겨 놓았다.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외치시니,
죽었던 사람이 나왔다. 손발은 천으로 감겨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여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는 것만큼 가슴 아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자기의 가족이 죽음을 보게 되면, 그 슬픔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다는 동생 나사로의 죽음으로 굉장히 더욱 큰 슬픔과 충격에 빠져 있습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그들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유대 사회에서 남자의 위치는 한 가정을 대표였고, 여인들의 대변자였기 때문에,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나사로는 단순한 동생이 아니라, 그들을 지탱하는 힘이요 기둥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사로가 지금 세상을 떠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죽은 지 사흘이 지난 시점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나사로의 누이들은 여전히 슬픔과 비통함에 잠겨 있습니다. 그들은 혹시 동생을 살릴 수 있을까 생각하고 급하게 예수님에게 부르기도 했지만, 예수님은 4일이 지나서야 도착하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마르다 모두 침통해 하고, 좀 더 빨리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한없이 아쉬워하였습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생각지 못한 큰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일 같으면 어느 정도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특별히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을 당하게 되면, 우리 역시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나사로의 경우처럼, 뜻대로 되지 않고, 결국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지게 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예수님 이름의 능력이 나타났어야 했는데, 하면서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비통한 경우에, 여러분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슬픔과 함께 왜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흔히 고통과 고난 가운데 처하게 되면, 자신이 당하는 그 고통과 슬픔과 비통함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는 그 슬픔과 고통 마저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지 위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죽음이 없으면, 우리 인간들의 죄가 용서함 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의 피가 없다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적 관점에서는 그것이 슬픔이고 고통이며, 비참하고 비통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것은 또 다른 은혜의 시작이라는 것을 우리가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15절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지금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을 때, 거기 계시지 않은 것을 오히려 기뻐하셨다고 하십니다. 왜냐면, 그들로 예수님을 진짜 메시야로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들로 예수님 외에 이런 일을 하실 분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예수님만을 믿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진짜 구세주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약 예수님께서 나흘이 아니라, 사흘 안에 오셔서 나사로의 병을 고쳐 주셨다 하더라도, 아마 사람들은 나사로가 나을 만해서 병이 나았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나사로가 나을때가 되어서 스스로 나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도와주셨다고 말들은 하겠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나사로의 병 고침 사건을 다르게 해석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여전히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4일이 지나 오신 예수님이 실제 아무것도 하실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늦게 오신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 오심으로, 나사로가 진짜 죽었다는 사실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는 이 진실은 부정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하는 신앙을 가지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이 오히려 예수님에게 은혜를 입게 되는 사건으로 변하게 하신 것이죠. 마치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행하신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게 하신 것처럼, 예수님에게 은혜를 받아야 살 수 있다는 진리를 알려주려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도 이기는 예수님을 다른 존재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말씀도 귀를 기울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고통도, 슬픔도, 죽음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중요하고, 그런 고난에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는지를 아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감당 못할 일을 당했다고 슬퍼하기 보다, 여전히 그 일을 은혜로 이끌어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이름을 더욱 의지해야 할 줄 믿습니다. 지금 당장 내 뜻대로, 간절한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불행을 행복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고통을 찬송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을 확신하며 우리 신앙의 인내를 끝까지 붙잡고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몇 날이 못되어, 복된 소식을 듣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의심하지 말고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줄 알고, 고통과 슬픔 중에라도 그 뜻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 백성 된 모든 자들이 생각지도 못하고 상상하지 못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죽은 몸 같은 100세에 인내함으로 아들 이삭을 얻었고, 또 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천청병력 같은 명령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또 다른 제물을 준비하심으로 자신도 살고, 아들 이삭도 살며, 믿음의 조상, 축복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3일째 오시든지, 4일째 오시든지,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불가능의 문제도 해결되고, 신령한 은혜를 입게 된다는 이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