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7일 하.복.주.새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신앙

송영종

산
산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신앙

요한복음 9장 35~41절

  1.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사람을 내쫓았다는 말을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만나서 물으셨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2. 그가 대답하였다. “선생님, 그분이 어느 분입니까? 내가 그분을 믿겠습니다.”

  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4. 그는 “주님, 내가 믿습니다” 하고 말하고서, 예수께 엎드려 절하였다.

  5.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6. 예수와 함께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말하였다.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

  7.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예수님의 많은 이적 가운데 또 한번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실로암 기적 사건의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날때부터 시각 장애를 가진 청년을 예수님이 만나시고, 그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 명하셨죠. 그 말씀에 따라 시각 장애를 가진 청년이 연못에 눈을 씻으니, 밝은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기적의 사건을 사도 요한이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전에도 계속해서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사건이 지금도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고, 예수님이 없는 지금 시대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예수님과 같은 또 다른 보혜사 성령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적은 일어나고 있고, 또 분명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눈을 보지 못한 사람이 보게 된 이 기적이 얼마나 기쁜 일인데, 그것보다 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느냐며 오히려 문제를 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을 미워하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이 청년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병자도 고쳐서는 안된다는 그들의 율법준수가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보게 된 청년에게 바리새인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보게 되었느냐?” 청년은 예수라 하는 분이 눈에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 하여 씻으니 보게 되었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분명한 사실이 있음에도, 그들은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보지 못하던 청년이 지금 보게 되었는데, 그들은 그럴리가 없다고 부정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바리새인들의 반응을 보고, 청년이 더 이상하게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분에게 허락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고 말하면서, 왜 예수님에 대해 믿지 않느냐고 반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급기야 그들은 청년을 쫓아내어 보냈습니다.

이런 장면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들의 생각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고집으로 인하여,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이 보게 되었음에도, 그들은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면 안된다는 율법에 얽매여, 하나님께서 율법에 메이지 않으신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잘못된 믿음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지금 이 청년이 보게 된 것에 그 어떤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분명 감사할 일이요, 기뻐해야 할 일임에도, 그들은 그것이 불편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어리석은 행태와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을 부정하는 불경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믿기는 믿지만 바리새인과 같은 믿음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이 쫓겨났다는 말을 듣고, 그 청년을 다시 찾아가 만나셨습니다. 이유는 그 청년에게 육신의 눈뿐만 아니라 영혼의 눈을 떠서, 자신을 고쳐 주신 분이 누구이고, 그리고 그 영혼까지 고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은 세상의 그 무엇을 주거나, 병을 낫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임을 항상 알려 주려 하십니다. 그래야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는 공적인 사역을 완성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년이 자신을 고쳐 주신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말하자, 37절에,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말씀하시며, 그가 예수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완전한 구원의 은혜를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보고 있으나 보지 못하는 자들일까요? 아니면 보지 못하지만 보는 자들일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적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결코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본다고 착각하는 자들은 절대 보지 못하는 자들이죠. 왜냐면 자기가 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보는데,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지도 않았는데, 본다고 말하니, 그들은 보지도 못하는 자들이고,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중세 시대에 카톨릭 신부들이 라틴말로 된 성경책을 가지고 있지만, 읽을 줄 몰라서, 자신들이 설교하면서도, 이게 맞는 말인지 틀린 말인지도 모르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율법주의에 빠지기 쉬운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기도 시간을 정해 놓고 그 시간만을 채우려고 애쓰거나, 형식적인 예배 출석에만 만족하며 내면의 변화를 놓치고 있진 않나요? 예배나 기도, 성경 읽기를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의무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왜 예배를 드리는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어떤 의미인지 놓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림자를 보고 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실체를 보고 그 실체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믿을 것인지를 발견하고 알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에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을 내려 놓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오직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세상은 악하고 영적인 것만 선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또 다른 이단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적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도 중요하다는 것이죠. 정리를 하면, 눈에 보이는 세상만 보지 말고, 보이는 세상 넘어 있는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기도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고, 그 백성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알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