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4일 하.복.주.새

이 시대의 아리마대 요셉 같은 자

송영종

산
산

이 시대의 아리마대 요셉 같은 자

누가복음 23장 50~56절

  1.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2.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3.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4.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5.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6.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7.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마침내 예수님께서 모든 공생애를 마치시고,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허리는 창에 찔리시며, 손과 발에 세개의 못이 박히시어 6시간 동안 피를 흘리시고 감당 못할 고통을 겪으시며 죽으셨습니다. 하늘은 어둠에 싸였고, 세상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적막하며, 오직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만이 메아리 쳤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 어느 누구 하나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그저 여기 저기 흐느끼는 여인들만이 있었고,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아무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외로운 죽음이었고, 너무나 처참한 주검으로,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당해야 할 그 모습 그대로의 모습으로, 대신 죽으셨습니다. 누가 죽음 앞에서 동행자를 얻을 수 있으며, 어떤 죽음을 아름다운 죽음이라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우리가 당해야 할 사망의 모습을 대신 보여주신 것이고, 그런 죽음의 이유가 바로 우리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원죄와 죄악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예수님의 안타까운 육신의 죽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왜 예수님께서 이런 십자가의 처형을 받으시고, 누구를 살리려 하셨는지를 발견하여, 우리 모두가 다 그 십자가 보혈의 은혜와 다시 죽지 않는 영생의 선물을 받아 누리는 구원의 백성들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그래서 다시는 우리의 죄악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그와 같은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옛날 못된 죄악의 습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 보혈의 피로 구원받음을 믿고 성령을 받은 자에게는, 이제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고집이 아니라, 성령이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그렇게 예수님 십자가와 그 보혈로 새롭게 변화된 한 사람을 우리가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그는 본문 50절에 나오는 요셉이란 인물입니다. 본문 설명에 의하면, 그는 아마도 산헤드린 공회의 공회원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공회는 엄청난 권력을 지닌 유대 기관이었습니다. 특별히 사법권과 행정권을 가지고 모든 일을 결정하고 집행할 수 있는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엄청난 고위 공직자였음을 알 수 있고, 그의 고향은 아리마대였습니다. 또한 마태복음에서는 그를 부자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분명 높은 자리에 있는 부자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장례를 치를 수 있게 예수님의 시신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상황입니다. 왜냐면 아리마대 요셉이 속한 공회에서 예수님을 방금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결정하였고, 빌라도가 그것을 승인하여, 예수님이 죽었는데, 그 공회원인 요셉이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시신을 내어 달라고 요구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 51절 말씀을 보면,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습니다. 공의의 결의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게 되셨지만, 아리마대 요셉은 그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다른 공회원들과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공회에서 잘못된 결정으로 예수님께서 죽으셨지만, 자신은 예수님의 장례를 치러야겠다 마음을 먹고, 빌라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준비한 바위에 판 빈 무덤에, 세마포를 입히고 예수님을 거기에 모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 지냈다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공회원이면서도,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하여 장례를 치렀다는 그 사실입니다. 왜냐면, 당시 상황에서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제자 12명 모두가 다 도망을 간 상태입니다. 아무도 예수님 편에서 말하거나 행동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조차도 멀리 서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말은 그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누가 감히 나설 수 있을까요? 만약 누가 나선다면, 아마 그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을 각오하고 나서는 자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도 죽을지 모르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요셉이 나섰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아니라, 공회원인 요셉이 나섰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이라고 그 분위기를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누구보다 공회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고, 자칫 자신도 죽을지 모르는 살벌한 상황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리마대 요셉은 그러한 것을 개의치 않고,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하였고, 장례까지 치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행위가 신앙적으로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요셉이 예수님의 부활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그가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하고 장례를 치렀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까지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 믿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아리마대 요셉은 모든 것은 던져서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부활은 아직 모르지만, 그는 설령 예수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길을 가겠다는 일사각오의 신앙과 믿음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 일로 공회원 자격이 박탈당하고, 유대 귀족 사회에서 쫓겨날 수도 있고,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당시 그는 그 모든 것을 버릴 각오로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지금 우리가 이런 아리마대 요셉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위치, 지위, 사람들의 시선, 자존심 그런 것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 나라에는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거룩한 교회와 성도들이, 이 시대에 아리마대 요셉 같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일사각오로 주를 따르는 참된 제자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