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일 하.복.주.새

지금 예수로 고난 받는 복된 자

송영종

산
산

지금 예수로 고난 받는 복된

누가복음 6장 20~26절

  1.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3.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4.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5. 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6.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7.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 5장에 팔복으로 유명한 말씀을 누가도 기록해 놓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히 복을 받는 8명의 사람에 대하여 강론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팔복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팔복은 말 그대로 팔복을 받는 사람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반면, 오늘 누가복음에 나오는 팔복은 본문 24절을 기점으로 화를 받는 사람에 대한 말씀을 덧붙여 강론하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20-23절까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가난한 자는 복이 있고, 주린 자와 우는 자가 복이 있으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미움을 받고, 욕을 당하거나, 혹은 버림을 당하는 복을 받을 자라면, 반면 24절부터는 반대로, 부요한 자와 배부른 자, 그리고 웃는 자들은 복이 아니라 오히려 주리고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라고 저주하시고, 그런 사람들은 항상 그런 불행한 결말을 가져왔다는 사실까지 함께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앞의 복을 받을 사람에 대한 말씀과 뒤에 화를 받을 사람에 대한 말씀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는 시점의 차이를 두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앞의 복을 받을 사람들의 경우는, 지금 현재 고난과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금 아무것도 손에 쥐는 것도 없고, 보이는 것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으로 고난과 고통, 핍박을 감당하고, 감내하며 살고 있는 진짜 예수의 사람들은, 나중에는 결코 억울하지 않게, 하나님 나라의 상과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반면에 뒤에 화를 받을 사람들의 경우는, 지금 현재 부요한 자들과 배부른 자들, 그리고 지금 웃고 있는 자들은 나중에 화를 당할 것이라는 심판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된 부요하고, 배부른 것이 마치 악인인 것처럼 착각하면 안됩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오늘 말씀은 아마 부르주아를 탄압하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기독교의 교과서로 전락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결코 부자나 배부른 것이 죄악이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고,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을 진짜 잘 믿고 따르는 제자들 중에는 부자들도 있고, 배부른 사람들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장사 지낼 정도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그는 공회의 고위관직에 있는 부자요 배부른 사람입니다. 베드로에게 전도 받아 예수님이 제자가 된 고넬료는 어떻습니까? 그의 직업은 군대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도 먹고 사는데 문제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께서 지금 부요한 자와 배부르고, 웃는 자라는 말씀은, 단순하 재산이 많고, 살기가 좋아서, 웃고 지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요한 자와 배 부른 자라는 것은 ‘지금’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난한 자와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베풀지 아니하고, 또한 현재 모든 것을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사람들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믿든 안 믿든, 혹은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지금 현재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누가 되었든지 간에 화가 임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지금 예수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시간도, 물질도,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은 ‘지금’ 수고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또한 그들은 ‘현재’ 아무런 고난과 고통, 핍박을 받을 일이 없음으로, 나중에 오히려 화가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그들의 이기적인 모습과 어리석은 생각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동화에 나오는 ‘개미와 배짱이’처럼 말이죠.

둘째로, 앞서 언급된, 지금 고난과 핍박을 받고, 나중에 복받을 사람들과 지금 자기 만족과 쾌락을 누리고, 나중에 화를 받을 사람들의 결정적 차이는 바로 그들 각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앞서 고난과 핍박을 받는 사람들은, 지금 자기 만족과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처럼, 자기만을 위한 시간을 따로 가지고, 가족과 함께 즐거운 여행을 보내며, 좋은 것을 누리고, 돈을 마음껏 쓰고 싶지 않을까요? 고난과 핍박받고 사는 사람들도, 자기 만족과 쾌락을 위해 사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현재 ‘자신의 삶’을 드리고,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시간을 내어 늘 주일을 지키고, 기도회를 가고, 성경공부를 하며,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헌금도 하고, 선교도 가고, 시간을 내어 특별히 영적 생명을 살리기 위한 헌신과 봉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구 때문에요? 예수님! 그리고 그것이 복이고 복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하고, 주린 자들과 영혼을 위해 우는 사람들에게는 말로 할 수 없는 복을 주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말은 ‘지금’ 우리의 보물이 하늘에 쌓여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말씀입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특징을 말씀하신 것이니까요. 하나님 나라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고, 자기 희생이 있는 자들이 그 나라의 백성이고, 예수님의 제자이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 만족을 위해 사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까요? 아니요. 그들은 자기 만족을 먼저 생각하고, 자기 자신과 자기에 속한 것들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합니다. 우선순위가 바뀌어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하고도 시간이 남으면, 그 때 예수님을 찾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고, 예수를 위하여 핍박받기도, 손해를 보는 것도 그들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해 주시는 아주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24절에 나오는 ‘이미(already)’라는 단어입니다. 그들은 이미 이 땅에서 지금 다 받아 누렸기 때문에, 나중에 그들이 받을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고, 받을 것만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화가 임할 것이라고 경고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그의 모든 시간, 물질, 인생을 오직 자신을 위해 다 사용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이 있을까요? 우리의 삶 속에 예수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복과 화라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요. 이것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선택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무조건 지금 내가 있는 여기에서 예수님으로 고난과 핍박과 수고와 헌신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이라고 선포하시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힘들어도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함께 가서, 나중에 감당 못할 축복을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누가 뭐라고 하고, 어떻게 했다고 하더라’ 하는 것에 전혀 신경 쓰지도, 판단하지도 말고, 오직 나만이라도 지금 우리 앞에 주어진 이 길을 끝까지 가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그 팔복을 받는 귀한 예수님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다시 한번 축원드립니다.